아쉽게도 부산 공연에는 지킬 성공 신화(?)의 주인공 조승우는 오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거니까, 공연 자체가 내려와주는 것만도 정말 기뻤다. 길 가다 시뻘건(?) 포스터를 발견하곤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마음을 다해 원하면' 뭐든 이뤄진댔던가. KBS 예술극장이며 EBS까지 다 챙겨보며 기다렸건만ㅡ직접 공연을 가지 않고 티비로만 보는데도 그토록 빠져들긴 처음ㅡ울산 공연은 하고 부산을 빼먹었을 때 내가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서울 앵콜 공연에 이어 다시 지방 순회를 해준다니, 게다가 그 날짜가 마이 스페셜 데이(?)와 겹치기까지 하니 적금 넣을 걸 빼돌려(?)서라도 당연히 가야만 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건 내가 너무도 여러 번 티비에서 주요 장면들을 섭렵해버렸기 때문일 거다. 그날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도 원인일 터. 아무튼 그 유명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고 온 간단한 소감을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야 늦게라도 남김.
지킬보다 하이드보다, 소냐 루시 인기 만점 ▼ more
캐스팅 일정을 살펴보니 지킬은 민영기ㅡ처음엔 서범석도 온다고 했었는데 취소돼버렸다. 오디션을 통과해 캐스팅된 두 사람 모두 평이 괜찮길래 누굴 택할까 여기저기 리뷰도 찾아보고 했었는데 완전 허탕. 마지막엔 거의 서지킬 쪽으로 맘이 기울었었는데!ㅡ, 루시는 소냐와 김선영이었다. 공연에서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지킬 역이 한 사람이니,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소냐를 택했다. 티비로만 본 거지만 최정원보다 훨씬 파워 넘치게 루시 역을 멋지게 소화해내는 소냐에게 이미 반해버린 나였다.
소냐 루시는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춤과 노래는 주인공 지킬보다도 더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꽤 오래 전 윤상이 진행했던 음악 프로에서 소냐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가수지만 뮤지컬이 하고 싶어 한국에 왔다며 대단한 열정을 뿜어내던 그녀가 참 인상적이었다(옆에서 윤상이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뮤지컬 <페임>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만의 매력으로 루시를 재탄생시킨 그녀는 더이상 '뮤지컬이 꿈인 가수'가 아니라 당당한 '뮤지컬 배우'로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멋졌다.
민영기의 대단한 파괴력, '민하이드'라 불러다오 ▼ more
1인 2역을 소화해내야하는 지킬 역은 정말 아무나 하기 힘들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 티비로 봤던 조승우도 그렇고 눈앞에서 본 민영기, 그리고 또다른 배우 류정한, 서범석, 모두 다 대단하다. 그 역을 소화해냈단 그 자체만으로. 지킬과 하이드는 철저히 다른 두 사람이다. 얼굴도, 목소리도, 행동도, 다 다르다. 심지어 배우 한 사람이 지킬과 하이드가 함께 노래하는 '이중창'을 불러야만 한다.
민영기만을 보고 와서 티비로만 봤던 조승우와 비교하는 짓은 어리석지만, 그래도 간단히 두 사람을 놓고 보자면 '조지킬과 민하이드'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지킬은 조승우가, 하이드는 민영기가 더 어울리더란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이드로 '변신'할 때 뿜어져나오는 민영기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무대 위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꽃도 그를 따라가진 못했다. 조승우의 하이드도 역시 뛰어났지만, '민하이드'는 그 뛰어난 수준을 한 번 더 넘어섰다.
그러나 민하이드의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민지킬의 존재가 너무 옅어져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도 초반까진 괜찮았는데, 하이드의 등장 후 지킬과 하이드 사이에 '명확한 선'이 없어져버렸다. 지킬이 하이드 같더란 말이다. 특히 한 노래에서 지킬과 하이드가 번갈아가며 등장할 땐 지킬의 목소리가 너무 굵었다(잠시 딴소릴 좀 하자면 이 때 조명도 받쳐주질 못했다. '변신'하는 타이밍과 잘 맞지 않았다). 노래를 빼고 보자면 연기도 '조지킬'이 더 나은듯(물론 조승우가 연기를 많이 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이 시점에서, 원래 오려다 못 온 서범석은 어떨지 더더욱 보고 싶다).
이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민하이드'에게 박수를 쳐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민하이드'로서의 모습만큼은 정말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드가 무대 위를 휘젓고 다니는 걸 보는 순간 아쉬웠던 부분은 모조리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그리곤 오로지 감탄만 하게 된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공포에 질린 채로. (루시의 방을 찾아오는 장면에선 이미 알고 있던 장면임에도 갑자기 등장해서 심장 떨어질 뻔 했다;;)
어쩌면 극중 가장 멋진 인물, 엠마 ▼ more스토리 다 알고 노래까지 다 아는 채로 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새롭게 발견한 게 있다면 엠마, 그녀의 당당함이다. 주요 장면들만 보여주는 티비에 비춰진 그녀 모습은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어느 스토리에나 등장하는 '착하고 예쁘고 순수한' 여주인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늘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괴짜 지킬을 남들이 아무리 비웃건 간에 사랑한다 말하는
그녀의 당당함과, 그 사랑에 있어서도 남자보다 적극적인
그녀의 주체성과, 지킬이 약혼식에까지 지각을 한다며 비아냥거리는 중년 부인을 센스 있게 한 방 날려주는
그녀의 재치와, 결혼식장에서 기어이 하이드로 변해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지킬을 사랑으로 감싸안는
그녀의 믿음에, 나는 반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답고도 당당한 엠마 역은 정말 김소현이 딱인듯싶다. 그 생김새, 그 목소리, 그 걸음걸이, 그 손동작 하나하나... 장기 공연에 앵콜 공연까지 쭉, 엠마 역만 더블 캐스팅이 없었던 건ㅡ비중도 꽤 큰데ㅡ아마도 그녀 말고는 적당한 배우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지킬, 하늘에선 편안하길그는 무슨 죄로 결혼식 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어야 했을까.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을 했을 뿐인데. 다만 분명한 것은 그런 그에게도, 악독한 하이드를 없애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그에게도, 내면 깊숙이 감춰진 '악'한 면이 있었단 거. 세상 누구에게나 그 '악'함이 숨어 있단 거.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불쑥 튀어나오는 자기 자신의 악한 모습에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고, 잘 다독여 잠재우려 노력해야 한다는 거.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간 지킬, 하늘에선 부디 편안하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 공식 홈페이지
- 2005. 3. 12. 8:00 P 부산시민회관 +) 솔직히, 박수 칠 때 일어서고 싶진 않더라.
앞서도 말했듯이 공연이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던 데다 음향도 무대 조명도 별로 맘에 들지가 않아서(다만 지킬이 양손을 쫙 뻗자 침대며 책상이며 모든 소품들이 뒤로 휙 밀려나는 모습은 이런 게 바로 럭셔리한 무대 세트구나 감탄), 뭣보다 그날의 정신 상태가 매우 별로였던 탓에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준 민하이드가 앞으로 나오자, 우아하고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엠마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무엇보다도 다른 배우들한테 미안할 정도로 확연히 차이 나는 박수 소리가 터져나온 루시를 보자,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그리고, 쓸데없는 잡담 하나. 지킬 공연을 보고 나서, 지난여름에 본 김동률 콘서트 <초대>가 얼마나 대단한 공연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 대단하다는 지킬 공연에서도 사람들은 곧장 일어서길 꺼려했다(한둘씩 차례로 띄엄띄엄 일어남). 개인적으로 예전에 본 몇몇 괜찮은(나로선 매우 감동적이었던)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도 '기립'은 없었다. 그러나 김동률 그의 마지막 노래가 끝나자마자 KBS홀 1,2층 사람들 모두 다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없이 박수를 쳐댔다. 그때의 그 감격과 그 감동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